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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바벨 탑(13)

창세기11장1-9절

1절과 2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새번역).

세상에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그리고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의사 소통이 스므드하게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 언어라는 것은, 원래는 작은 공동체마다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가 조금씩 넓혀져 갑니다. 몇몇 마을과 읍내가 같은 하나의 공동체로, 더욱더 커다란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살아 가도록 됩니다. 그 위에 나라가 생긴다. 그때마다 언어라는 것은, 서로 통하는 것에로 진화해 갔다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서로 통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공통의 언어를 갖는 것으로, 공동의 생활의 폭을 넓혀 간다. 그러한 나카마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쓰고, 넓은 하나의 장소에 살게 되었다고, 여기에는 쓰여져 있습니다. 뿔뿔이 되었던 자들이, 하나의 장소에 모여서, 함께 힘을 합쳐서 살게 된다. 그러한 것이 이 11장에 쓰여져 있는 사정이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좋은 것입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산다. 이상적인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발전단계를 맞이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3절, 4절에 쓰여져 있는 말입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또 하나의 커다란 발전. 그것은 인간이 돌 대신에 벽돌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흙 대신으로 역청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돌이라는 것은, 물론, 대소 갖가지 것이 있어서, 그것을 하나 하나 맞붙여서, 구성해 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벽돌은 그 크기를 사람이 계산하는 대로 만들 수가 있다. 그리고, 진흙보다도 역청은 물체를 연결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해서, 지금까지는 돌을 쌓아 올려서 하고 있던 것을, 벽돌을 만들어서, 게다가 역청을 써서, 벽돌과 벽돌의 사이를 튼튼히 한다. 그 일로 인해서, 사람들은, 보다 높이, 보다 큰 건물을 만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즉, 문명의 획기적인 발전의 때를 맞이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는, 바야흐로 하나가 되어서, 같은 언어를 쓰고, 그리고 돌 대신에 벽돌을, 진흙 대신에 역청을 얻었다. 즉, 새로운 때를, 커다란 발전의 때를 맞이했다고 하는 셈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즉 이는, 새로운 시대의 슬로건을 내세웠던掲げた 것입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

이 말은, 실로 자신에 넘친 말입니다. 언어를 하나로 할 수가 있었다. 커다란 문명의 발전의 때를 맞이했다.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혜, 인간의 힘에, 무한의 가능성을 사람들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짓자“. 이 하늘까지 닿는 탑이라는 것은, 아마, 하늘의 하나님을 의식한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닿을 만한 탑을 짓자”. 즉,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하나님에 가까운 능력을 가졌다. 하나님에 버금가는 힘, 지혜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한 자신에 넘쳐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탑을 건설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름을 올리자, 인간인 것의 영예을 보이자, 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대해선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입니다. 자기들의 이름을, 하나님에게 대해서 보여 가자, 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자기들 가운데서 일치하자. 힘을 합쳐서 같이 살자. 인간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들의 지혜로, 완성한, 견고하게 한 덩어리가 된,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 내자.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하나님 없이, 인간은 그만한 능력과 실력과 지혜를 얻었던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없어도, 자기들의 행복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마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종종 갖고 있는 생각思い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내려 오셨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은, 제법 높은 탑을, 자기들이 짓고 있는 속셈이었습니다. 하늘에 가까울 만한 탑을, 자기들이 지을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내려 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의미가 이 말에는 담겨져 있습니다.

여호와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6-7절)

인간의 자신에 찬 시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언어를 혼란시킵니다.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서, 인간은 같이 살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즉, 인간의 언어의 혼란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것이 말해지고도 있는 것입니다.

무릇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고민은 무엇이냐고 하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어도, 그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친한 이 사이에서도, 아무래도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 부모자식이었다고 해도, 혹은 남편과 아내 사이였다고 해도,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일상회화는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의 제일 깊은 곳에서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아니, 알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통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한다. 육친이니까 통하지 않는가.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살아 온 것이니까, 통할 것이지 않은가.이렇게 친한 사이인 것이니까, 통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조바심하는 것입니다. 제일 깊은 갈라진 곳裂け目라는 것은, 제일 가까운 자와의 사이에 생겨납니다. 즉, 인간은 같은 말을 쓰고 있으니까, 일치할 수 있는 셈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즉, 거기에 말의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제각각, 절실히 그것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말에는 한계가 있다. 어떻게 해도 통하지 않는 것이, 우리 안에 남아 버린다. 말이 혼란 하여, 사람이 뿔뿔이 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직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거기로 하나님이 개입해 오신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없이 만족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혹은, 인간의 세계가 하나님 없이 완성하는 것을 하나님은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말에 듣는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말을 하나님에게 붙이는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사람과 만나고,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바라신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듣고,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그 교제 안에서, 사람의 영혼은 깊은 평온함과 위로를 받을 수가 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친한 자여도, 사람의 말에 의하여서는 근본적인 위로나 평안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불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확실히 자신의 것을 이해하지 않겠냐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인간에게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절한, 정성어린 말이었다고 해도, 그 말로 우리의 영혼이 평온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마주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에 의해서 사람은 비로서 평온할 수가 있는 존재입니다.

8절이하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 도시의 이름은 “바벨Babel”이라고 불리웠다. 결국, 혼란해서balal, 하나가 되려고 해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온 지면에 하나님에 의해서 흩어져 갔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자기들의 높은 탑도, 자기들의 이 도시도 그들은 완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능력이나 지혜로, 이 세계를 인간은 완성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힘을 결집하면 완성된다든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이 세상의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든가, 그런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니, 애초 사람이 힘을 결집한다 라는 것은, 정말은 할 수 없다. 마음을 하나로 한다 같은 거, 말로서는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런 것을 할 수 있었던 선례가 없다.

힘을 결집하려고 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폭발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하려고 하면, 쪼개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면 일수록, 우리 인간은 혼자다 라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혹은 심각한 것이면 일수록, 사람의 마음과의 사이에 있는 갈라진 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된다. 도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사람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다 라고 통감하는 지점. 누구에게도 마음이 도달하지 않는다고 통감하는 고독의 장소.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온 땅에 흩어집니다. 아무리 친하게, 흥겹게, 즐겁게, 같이 지내고 있었다고 해도, 어딘가에서 모두 제각기 혼자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장소에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주신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흩으로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중함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의 시작입니다.

有森正라는 그리스도인 철학자가 이러한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남에게 알릴 수가 없는 마음의 한 구석을 갖고 있습니다. 추한 생각이 있으며, 또한 비밀의 생각이 있습니다. 또한 은밀한 욕망이 있으며, 아무래도 타인에게 알릴 수가 없는 마음의 한 구석이라는 것이 있고, 그러한 장소에서 아브리함은 하나님을 만나뵙고 있다. 거기서 밖에 하나님을 만나뵐 수 있는 장소는 인간에게는 없다. 인간이 이 사람 저 사람 꺼리지 않고 지껄일 수 있는, 관념이나 사상이나 도덕이나, 그러한 곳에서 인간은 누구나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남에게도 말못하고 부모에게도 말못하고, 선생님에게도 말못하고, 자기만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또한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거기서 밖에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アブラハムの信仰」『土の器に』日本基督教団出版局1976年、21−22p)。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상담해서 해결하는 것같은 문제밖에 우리가 갖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필요없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않는 아픔을 우리의 영혼은 갖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거기서 우리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서6장6절에, 주 예수의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혼자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장소에서,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렇게하면, 감추어진 것을 보고 있으시는(공동번역개정판;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 갚음이라는 것은, 만남이겠지요. 하나님과의 만남이겠지요. 단 혼자서 고심하고, 괴로워하는 우리를,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기다리고 있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 그것은, 그 장소로 가기 위함입니다. 그 장소로 가는 자로 삼아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자로 삼아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다 라고 해서 탄식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고독하다” 같은 거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혼자인 것은 출발점인 것입니다. 혼자인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위로를 받는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힘을 받고, 그리고 거기로부터 살기 시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모두 사이좋게 지내자 하고 생각해서 모인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러나, 흩으러진 장소, 그것은 우리의 사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인간은 고독, 그러나, 우리는 이 흩어진 장소로부터 살기 시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독한 장소로부터, 우리는 일어 설 수가 있다. 그것이, 이 세상으로 나가는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