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2018.06.27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21)

고린도전서15장29-34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31-32절)

이 편지를 썼던 것은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지만, 그는 여기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정말로 죽고 있다고 하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 비유적인 말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날마다 죽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있다고 하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를 위임하고 있다, 혹은 자기를 일임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고 하는 식으로 읽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뭔가에 일임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즉 자기의 힘으로는 자기는 살고 있지 않다. 아마 누구나 그렇겠지만, 신앙을 갖기 전에는 바울도 그랬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자기 힘으로 길을 내면서 분발하여 살아 왔다고 하는 자각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력으로는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 저는 이러한 장면에 조우했습니다. 오후, 동경의 山手線에 탔었지만 좀 더운 오후로, 서 있는 사람도 제법 있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역에서 유모차를 밀고서 여성이 들어 왔습니다. 보니까 베비카- 안에는 아기가 푹 자고 있는 것입니다. 다소 피곤한 표정의 전철 안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것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푹 잠들어 있다. 즉 자기를 지키고 있어 주는 존재—이 경우는 모친이겠지만—를 믿고 있으니까, 아기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날마다 죽고 있다”고 하는 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그 상태의 것입니다. 즉 스스로 주위의 위험이나 적으로 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 깨어서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잘 보면 위험은 있다고 하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서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도 능력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를 지키고 있어 주는, 자기와 같이 있어 주는 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있어서 살고 있다. 혹은 자기를 일임한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 살고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다음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새번역)“. 바울은 에베소에 전도했을 때에 엄청난 박해를 만났습니다. 영문도 모를 많은 군중이, 이 바울에게 바싹 따른다고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신전의 은세공인들이 바울의 전도(주;”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행19:26)에 대단히 화를 내서, 이대로라면 자기들의 직업을 꾸려 나갈 수 없게 된다고 해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쓰여 있습니다(행19:23-27)(주;”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행19:24)). 물론 바울들에게 그만큼의 영향력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바울은 갖가지 곤란 가운데서 에베소에서 3년동안 전도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전도 가운데서도 가장 긴 전도였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 맹수와 싸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문도 모를 강대한 힘이 갑자기 앞에 나타나서, 그것과 싸웠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치가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생에는 스스로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리할 수 없는 큰 힘, 혹은 처리할 수 없는 큰 적은 정말은 있는 것이 아닌가. 바울이 맹수와 싸운 것 같이, 우리의 힘이나 지혜로는 처리할 수 없는 큰 힘, 큰 어둠이라는 것이 있어, 그 큰 어둠에 에워싸여 우리의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때에 우리는 약함을 느끼며, 자기자신의 한계를 통감케 된다. 이 얼마나 자기는 무력한 것일까 하고 생각케 된다. 마치 자그마한 아이가 암흑 속에서 갑자기 깨어서 울기 시작하고, 그리고 부르짖는 것 처럼, 인간의 생명은 압도적인 어둠 안에 있는 것이다, 고 하는 것을 누구나가 어딘가에서 알게되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자기의 힘으로 뭐든지 돌파해서 살아 가는, 그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죽노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버리고 있다고 하는 의미이고, 동시에, 자기를 일임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자기가 강하게 되어서, 힘을 저장해서, 그리고 갖가지 곤란을 하나 하나 돌파해 간다고 하는 듯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에 의해서 점차 자기 안에 힘이 저장되어 와서, 뭐가 와도 두려워 하지 않는 힘을 얻는다, 고 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다. 자기를 일임해서 살아 간다. 하나님께 자기를 일임할 수가 있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 신앙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서30장15절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것이 신앙, 믿는 자의 힘입니다. 자기의 갖고 있는 강함, 자기의 강함이 아닌, 혹은 스스로 이렇게 해서 서 있는 것이다고 하는 자기의 힘도 아닌, 혹은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어딘가에서 툭 꺽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견딜 수 없는 바람이 불어 오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로서는 견딜 수 없는 바람이 불어 온다. 위임하고 있는 인간은, 쓰러져도 거기서 떠받쳐져서 또 일어 선다. 당차다 하면 당찬, 끈질기다고 하면 끈질긴 강함입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일임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의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이 나의 죄를 대속하고, 죄를 사해 주셨던 그 구주가, 부활을 해서 같이 있어 주신다. 그 분에게 자기를 일임한다, 자기를 맡긴다.

시편23편4절에 이렇게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저 사막에는 큰 바위 산이 있어서, 큰 바위 산을 사이에 둔岩 작은 길이 있다. 거기는 일년동안 해가 닿지 않는다. 실제로 그러한 이름의 골짜기가 있다고 하는 것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라는 것은, 현실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기 보다도, 우리 모두가 걷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빛이 닿지 않는 장소입니다. 거기는 혼자서 밖에 걸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혼자서 밖에 걸을 수 없는 좁은 어두운 길입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눈을 뜨고서 걸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은 단지 마지막이 있다(죽는다)고 할 뿐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기의 살아 온 것과 떼어 놓을 수 없는 형태로, 주욱 새겨 넣어진 죄라고 하는 것에의 두려움이 누구의 배후에도 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害)”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생명이 끝나는 것에의 두려움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의 과거나, 혹은 자기가 청산할 수 없었던 것을 남기고 있는 것에의 두려움, 겁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주 보는 존재로 지음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은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그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함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있으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경우의 “주”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어 주셨던 분이, 나의 죄를 사해 대속해 주셨던 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같이 걸어 주시니까, 나는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에도 이제 해(害)는 없다, 죽음의 해(害)는 제거되었다. 모두 그렇습니다. 즉 죄의 문제를 청산해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그 저편의 생명에 연결되는 길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죽노라”고 하는 이 말은, 딴 말로 하면, 그러한 식으로 해서 매일 살고 있는 것이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위임하여서, 나는 매일 죽고, 그리고 날마다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대한 맹수 가운데를, 영문도 모를 큰 맹수를 마주 대해서, 우리는 모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피해서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함께 걸어 주시는 분에게 일임해서 산다, 위임해 간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맹수와 인간은 싸울 수는 없다. 그런 힘, 그런 무기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기가 베비카에 떼밀리어 가는 것 처럼 떼밀어 받아 가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해서 통과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30절)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생각하면 적이 있다. 장애가 있다. 맹수가 있다. 그러나 그 위험의 저편이 있는 것입니다. 이 위험을 넘어서 영원의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위험 속을 가는 것입니다. 위험을 향해서 걷는 것입니다. 곤란을 향해서 나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살아 가는 인생의 시련, 곤란의 저편에 생명이 있다.

만일 부활이 없으면, 생명이 그 앞에서 끝나는 것이라면, 위험은 무릅쓰지 않는 편이 좋은 것입니다. 눈 앞의 곤란이 있으면, 곤란에는 맞서지 않는 편이 좋은 것입니다. 도망치면 좋은 것입니다. 혹은 거기서 머물러 남아 있어서 웅크려 버리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다. 우리의 이 죄의 생명에는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속죄함 받아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길을 앞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웅크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문제는 있지만, 위험하지만, 그 저편으로 그리스도가 같이 걸어 주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의 생명에 주어져 있는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