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1 주가 구하시는 것

예배에서는 생략한 부분을 원고대로 싣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2장1-11절, 에스겔13장20-23절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날이 가까왔을 때, 한 여자가 자신의 소중히 하고 있던 향유를 주 예수의 몸에 부었다. 이 이야기는 아마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주 예수의 지상의 생애의 일어난 일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이야기로 전해지고, 가장 깊게 교회의 최초의 날들로부터 사랑받은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개역개정판/새번역/공동번역개정판은 병행 기사가 마태복음26장, 또는 마가복음14장에 기록되어 있다고 쓰고 있지만, 아마 누가복음7장의 36절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도 같은 사건의 것이 아닌가 하고 상상되고 있다. 이 요한복음서의 이야기의 묘사는, 그 말의 꽤나 깊은 뉴앙스까지 누가를 닮고 있습니다(주; 마태와 마가는 향유를 머리에 부은 것으로 나오지만, 누가에서는 발에 붓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또한 요한복음서 독자적인, 자신에게 전해져 온 이야기를 소중히 한 기술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장소는 베다니아, 상황은 대단히 엄중한 때, 직전의 11장 최후의 말에 의하면, 당시의 권위자들이 예수의 있는 곳을 알면 곧장 신고하라고 명령을 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체포영장이 이미 발부되어 있던 때였다고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 장면을 지금 우리가 친숙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서 상상해 보아도, 꽤나 긴장되는 장면을 마음에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주 예수는 그와 같은 위기를 피해서, 잠시 광야에 가까운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 있으셨다 라고, 같은 11장의 54절은 쓰고 있지만, 유월절이 다가와서 최후의 날들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기 위해서 돌아 오셨다. 체포영장이 발부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다고 하는 일이 일어난 베다니아로 돌아 오셨습니다.

이때 주 예수께서 어디에 체재하셨냐고 하는 것은 반드시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3절에, “집“이라고 있습니다. 이 집은 누구의 집인지 반드시 분명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해석이 둘로 나뉘는 것입니다. 11장이 기록하고 있었던 것처럼,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형제 세 사람을 주 예수가 매우 사랑하고 있으셨다. 그 중의 아마 동생였음에 틀림없는 나사로가 죽어 버렸던 것을 주 예수가 무덤에서 불러 일으켜 주셨다. 그 일어난 일의 직후의 것이었으며, 여기 그 세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1절에는 거기에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라고 있습니다. 2절에 의하면 “마르다는 일을 하고(개역개정)/시중을 들고 있었고(새번역)“(주;쓰이고 있는 말이 “diakoneo”. to wait at table. 눅17:8/요12:2). 누가복음서 10장이 전하는,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에서 보면, 마르다는 일꾼이었던 듯하고, 곧장 부엌에 서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어서, 여기서도 접대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에 마리아가 등장하여, 주께 향유를 붓습니다. 이와 같이 세 사람의 형제가 가지런히 있는 것이므로, 그 세 사람의 형제자매의 집었으리라고 읽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읽기가 있습니다.

마태나 마가의 병행 기사를 읽으면, 이 일이 일어났던 것은 나병 환자 시몬의 집이었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 깊은 것은, 누가복음서 7장36절이하도 시몬이라는 이름을 또바기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시몬은 나병 환자라고 하기 보다도 바리새파 사람이었다고 있는 것입니다. 나병환자이고 바리새파였을지도 모릅니다. 유대 사람들은 마치 明治期에 들어가기 전 일본의 서민들 처럼, 성을 갖지 않고 이름 뿐이었다. 예를들면 시몬이라는 이름 뿐으로, 우리도 시몬이라고 하면 시몬 베드로든가 그외의 시몬을 생각해 낼 수가 있는 것처럼, 극히 보통의 이름이었다. 거기서 다른 시몬과 구별할 수 있도록, 시몬 베드로라고 읽었다. 베드로라고 불리는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란 바위를 의미하는 별명입니다. 거주하고 있는 동네로 나눈다고 하는 듯한 구별을 할 적도 있다. 나사렛 예수라는 것도, 그 종류입니다. 이 시몬은 불행하게도, 나병 환자 시몬이라고 불리고, 구별되고 있던 것이겠지요. 추측을 더한다면, 아마 주 예수로 인해서 그 병에서 해방되어 있었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러나 세간이라는 것은 그러한 점에서는 냉혹한 것이어서, 한번 이름이 붙으면 그대로, 설령 병이 고침을 받아도 문둥이 라고 부르고, 어딘가에서 피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손을 잡는다고 하는 것도 꺼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같은 식탁에 앉는다니,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같은 사람들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은 때, 주 예수가 이 나병 환자라고 부르셨던 시몬의 집에서 최후의 고난이 시작되기 전의 수일간의 쉼을 얻고 있으셨다고 상상하는 사람도 많다. 이것도 또한 주 예수께 걸맞는 모습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감쪽같이 시몬의 집인지 나사로의 집에 들어 가실 수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 주위 사람들의 아는 바가 되고, 예루살렘에까지 그 뉴스가 미치고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9절에 의하면, 큰 무리가 와서, 예수만이 아니라 나사로를 보고 싶다고 했다. 옛날도 지금도 인간의 구경꾼 근성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9절이하의 기술은 참으로 소연한 정경을 그리고 있지만, 11장의 마지막이 쓰고 있는 긴장된 상황과의 틈새에 있어서. 이 집에 있어서의 광경은 참으로 조용한 것입니다. 거의 소리 하나 나지 않는 듯한 곳에서 마리아의 몸짓이 낳는 소리音가 희미하게 들려오거나, 혹은 마르다가 나르는 식기 소리가 나고 있다. 거기서 가룟 유다의 말과 주 예수의 말씀이 말씀되고 있습니다.

이 정경을 요한복음서는 그리 많은 문장으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새번역).

말하자면, 여기 그 정경이 집약해서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간결한 서술이지만, 그러나 여러분도 읽어 보시고, 제가 말하는 말을 듣고 있어서, 금방 생각하시겠지요. 아마 여러분의 마음 속에 향기가 가득 차고 있는 한 채의 집 안이 보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방이라는 것뿐이 아니라 그 집 전부에 향기가 차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허락되는 신앙의 상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를 써서 기록하고 있던 요한,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 혹은 요한에게 이 말을 전한 사람들은, 이것이 베다니아의 나사로인지 시몬의 집의 이야기만이 아닌, 우리의 교회의 모습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주의 식탁, 성찬이 마련되어져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서가 생겨난 무렵도, 물론 성찬을 반복해서 축하했습니다. 어쩌면 집회마다 축하했을지도 모릅니다. 개인의 집에 모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하의 묘소에 모였다. 죽은 자의 냄새가 차 있는 곳에서, 포도주의 잔이 돌 때 그 향기가 주변을 채운다. 그때 이 여자가 바친 향유가 이 집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도 또한 이 향기가 가득 차는 곳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 그 향기 가운데서 마리아가 해 준 것을 새삼 생각해 내어, 또한 새로운 감사와 기쁨에 넘쳐서 마리아의 이야기를 이야기로 전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회는 그와 같이 해서, 이 향기에 찬 집의 역사를 만들면서, 그것과 겹쳐지는 이 이야기를 이야기로 전해서 살아 왔습니다. 11장의 39절에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선 주 예수가 무덤의 덮개가 되어 있는 돌을 치우라고 말하셨을 때, 마리아가 당황해서, 이미 나흘이나 지나고 있다, 유감이지만 동생의 육체는 죽음의 냄새를 픙기고 있다고 말 않고 있을 순 없었다. 그 때에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알고 있는 죽은 자의 냄새를 알아챈 것이지만, 그 같은 복음서가, 지금 여기서 이 향유의 향기를 말하고 있다. 거기, 참으로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좀전에 에스겔서 13장20절이하를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새 잡듯이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데 사용하는 너희의 부적 띠를, 내가 물리치겠다. 내가 그것을 너희의 팔목에서 떼어 내고, 너희가 새 잡듯이 사냥한 영혼들을 풀어 놓겠다. 또 내가 너희의 너울을 찢어서, 너희 손에서 내 백성을 구해 내고, 그들이 다시는 너희 손에 사냥감이 되지 않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나는 의인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았으나, 너희가 거짓말로 그를 괴롭혔으며, 악인의 손을 너희가 강하게 만들어 주어서, 그가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살 길을 찾을 수 없게 하였기 때문에, 너희 여자들이 다시는 헛된 환상을 못 보게 하며, 점괘를 말하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내가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새번역).

에스겔서와 지금의 이야기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하신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스겔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마리아와는 다른 딴 여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점치는 여자들이어서, 이 여자들에 대해서 주 하나님이 해방을 선언하고 있으시다. 그냥 여자 점쟁이, 역자들을 상대로 해서 이토록 야단스러운 말로, 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20절에서는 “새 잡듯이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데 사용하는 너희의 부적 띠를, 내가 물리치겠다“라고 하나님이 말하고 있으십니다. “내가 그것을 너희의 팔목에서 떼어 내고“라고 고하고 있으십니다.

20여년전의 일이지만, 전후, 아주 유명했던 여자 정잼이의 명인이라고 말해졌던 사람이 살해당했다고 해서 뉴스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어떤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의 전부가 이 여자에게 의견을 구하고 있다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존경하고 있던 셈인 그 사람도 이 사람도 하고, 그 이름을 발견했을 때, 아연실색했다고 했습니다. 어찌된 나라의 지도자들인가. 그리고 그 때에도 이 에스겔서의 말을 생각해 냈습니다. 일본은 아직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방의 역사(役事)를 받고 있지 않은 나라인 것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각총리대신의 비판을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팔목마다 부적 띠를 꿰매고“(겔13장18절)라고 에스겔은 말합니다. 당시 1994년의 총리대신도 또한 이 여자 역자에게 의견을 물었다고 확실히 쓰여져 있다. 그러한 사람의 지배를 왜 받을 수가 있는가.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참 하나님에 의해서 해방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곤 있을 수 없습니다.

베다니아 동네에서 마리아의 향유 접대를 받고 있으셨을 때에, 주 예수가 마음 속에서 보고 있으셨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도 그러한 어리석은 데서 해방하기 위한 뜻이어서, 게다가 그때문에는 주 예수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의 힘에 우왕좌왕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는, 그와 같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둘러싸여서, 여기 잠시의 때를 지내고 있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마리아의 행위가 얼마나 주 예수께 있어서 기쁨이었던 것인가. 마리아는 자신이 접대를 하고 있는 이 예수라는 분이 국가에 의해서 사형에 정해져 버리고 있는, 그 의미에서는 중대한 범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똑똑히 이 주 예수의 생명이 노려지고 있는 것이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남자가 갖고 있지 않은 듯한 풍요로운 감성에 의해서 감지할 수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감성이라는 말도 맞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1장은, 예수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를 주 예수께서 사랑하고 있어 주셨다고 똑똑히 쓰고 있었습니다. 2번이나 3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의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마리아는 이 주 예수의 사랑을 고맙게 받아 들이고 있었으므로, 사랑하는 분의 죽음을 이미 두려워해 슬퍼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 예수는 자신의 사랑하는 형제 나서로를 무덤에서 불러내 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추측을 합니다. 왜 여기서 나드 향유를 부었던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나사로가 그대로 무덤 안에 있다면 사용했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9장의 최후를 읽으면, 주 예수를 장사할 때에 니고데모가 주 예수의 몸을 역시 향유를 갖고 씌우고 있습니다. 이때에는 몰약과 침향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드 향유만큼 값비싼 것은 아니었으리도 모르지만, 그때에는 백근, 즉 마리아가 쓴 것보다도, 그 100배나 하는 듯한 분량의 것을 썼다고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사로를 장사할 때에 마찬가지 향료를 사용해서 이미 나사로의 장례를 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 안에 그래도 여전히 냄새가 감도는 듯한 것을 두려워해서, 언젠가 누군가 남에게 부탁해서 돌을 치워받고서, 다시 한번 그 향유를 사랑하는 동생 나사로에게 부으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금 필요없게 되었다. 거기서, 그때문에 간직해 둔 아주 소중한 향유를 주 예수께 부었다고 볼 수도 있다. 죽은 인간에게 마련한 것을 산 인간에게 붓다니 무슨 일이냐 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 예수는 기꺼이 받아 들이고 있으시다. 왜냐고 하면, 그것은 또한 마리아의 사랑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13장을 읽기 시작하면 금방, 주 예수께서 제자들의 것을 극도로까지 끝까지 사랑하고 있으셨던 것이므로, 라고 해서 주 예수가 제자들의 발 밑에 무뤂꿇고 앉아서 종의 모습이 되어서 그 발을 씻고 닦았다고 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그것과 아울러 생각해 보면, 여기서 이미 마리아는 주 예수가 하셨던 종의 행위, 주 예수의 사랑의 행위를 선취해서 주 예수께 바치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서로 발을 씻어 주는“(13:14) 마음이 이미 여기서 본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리아의 행위는 단순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인 것일까. 순수하고 대단히 값비싼 나드 향유, 얼마나 값이 비싼가 하는 것은, 5절의 유다의 말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1데나리온이라는 것은, 어른 하루의 보수입니다. 결국은, 1년 일해서 겨우 손에 넣을 수 있는 인도산의 향유인 듯합니다. 한 근litra이라는 단위는 재미있는 표현이어서, 우리가 쓰고 있는 리터라는 단위의 원래의 말입니다. 326그램. 그 향유를 주 예수의 발에 발랐다. 식사에 초대한 귀한 손님의 발을 깨끗이하는 것은, 본래, 노예의 일이었다고 설명됩니다. 어떤 사람이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식사가 시작되고서 라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주 예수의 발 밑에 웅크렸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머리 털로, 라는 것은 아무리 뭐래도 특별한 행위다 하고 사람들은 지적합니다. 유대 여성은 자신의 머리 털을 아주 소중히 했다. 남자도 그렇습니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생명의 나타남 처럼 중시되고 있던 것인 듯합니다. 그 긴 머리를 풀어서, 그걸로 예수의 발을 닦는다. 부주의로 남에게 만지게하지 않도록 할 정도로 소중히 한 머리 카락을 썼다. 여기에는 이 여자의 헌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부어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서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이러한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11장에서 마침내 주 예수가 베다니아까지 오셔서, 나사로가 이미 죽어 있는 것을 보시고서, 곧장 언니 마르다와 만나셨습니다. 거기서 마르다와 주 예수와의 깊은 신앙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처음은 주 예수께, 당신이 여기 있어 주셨다면 나사로는 살아났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그후 주 예수께 인도함 받듯이 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1:27) 라고 신앙을 표현하기에 이릅니다. 그후, 동생 마리아도 주 예수를 만나뵙니다. 마리아도 언니와 똑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당신이 만일 여기 있어 주셨다면, 하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앞의 마르다가 말한 신앙의 말을 마리아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때문에 적잖은 비판적인 말씨를 쓰는 사람은, 11장에 있어서는 마리아의 마음은 마르다 만큼 깊어져는 있지 않았다, 주 예수께 대한 신앙은 마르다만이 얻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랬다고 해도, 여기에 이르러서 마리아는 입에 담고는 있지 않지만, 그 행위를 가지고서 자기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입에 담은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언자・왕・제사장, 하나님께 특별히 힘을 부어져 올라야 할 책무에 오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가지고서 향유를 부는다고 하는 의식을 했던 것같습니다. 얼마 안있어 유대 사람들의 위기가 점점 깊어졌을 때에, 거기에서 구해 내기 위해서 와 주실 구주는, 바로 메시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이름에 적합하게, 예언자이기도 하고 왕이기도 하고 제사장이기도 한 분일터이다, 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주 예수께서 오셨을 때, 대체 누가 기름을 부었던 것일까. 이 마리아입니다. 하나님이 영의 기름을 부으셨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지상에서 실제의 기름을 부었던 것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여기서 주 예수의 취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주 예수는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들어 가십니다. 사람들은 환호해서 이를 왕으로서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를 맞이한 사람들은 금방 주 예수를 배반합니다. 배반하지 않았던 것은 마리아입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12:7). 주 예수의 이 7절의 말씀은, 실은 번역이 적잖이 어려운 곳이어서, 여러가지 해석이 되어지는 곳입니다. 예를들면 New English Bible이라는 영어 성경의 번역이 있지만, 그것을 조사해 보면, 이것은 전혀 다른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그 몸짓을 그만두게 하라. 나의 장례의 말을 위해서 간직해 두도록“입니다. 실은 원문은 아무래도 그와 같이 읽는 것이 바르다고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전부 끝까지 붓고 있지 않다. 주 예수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멈추게 해 줘 라고 말하셨다. 한편으로 고맙게 그것을 받아 내고 있으시면서, “마리아여, 그것을 그만두라. 네가 정말로 나의 사체에 이 향유를 붓지 않으면 안될 날이 곧 온다. 그때까지 기다리라“, 그렇게 말하셨다고 읽을 수도 있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그와 같이 해서 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사이에 두는 것처럼 해서 향유를 부어서 대비를 하고, 향유를 부어서 주 예수의 십자가의 일하심의 마무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뜻은 물론 주 예수를 메시아로서 세우고 있으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실제로 향유를 부은 것은 이 여자였다. 카톨리교회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의 식탁을 둘러앉습니다. 카톨릭교회와 우리와 성찬에 관한 사고방식이 다른 곳이 있다고 지금도 말해집니다. 카톨릭의 분들은, 성찬이 보이는 주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을, 성찬 때마다 교회가 새삼 다시 바치는 것이다 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취할 수 있는 말이 미사에 있어서 쓰여집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의 인간은, 주 예수의 희생은 단 한번 주 예수 자신이 바치셨던 것이므로,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찬은 또한 우리의 바치는 것인 것이 아닌가. 예를들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여러 분이 바친 헌금을 주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성찬과 같은 테이블 위에 놓고 있습니다. 교회에 따라서는 다른 테이블에 놓을 적이 있다. 황송하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예배의 최초의 교회 사람들이 바칠 것을 갖고 와서 먼저 하나님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바쳐져 있는 빵과 포도주를, 후에 주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나누어 받았던 것입니다. 그 기본적인 곳으로 돌아간다면, 이 성찬은 우리의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고 볼 수도 또한 허락되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카톨릭의 분들이 그러한 이해를 갖게 된 출발점에는, 어떤 바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곧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같은 주의 성찬이 놓여 있는 식탁에 우리의 헌금을 놓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우리 교회에서도 헌금을 제게로 가져 오시지 말고 성찬탁에 놓기로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굳이 감사헌금 봉투의 내용을 읽는 것이 아니므로. 대체 이 바치는 것에 어떤 값어치가 있는 것인가. 값어치를 갖는 듯한 헌물을 우리는 우리는 언제나 하고 있을까. 저도 얼마 안되는 헌금을 넣은 것을 놓으면서, 이는 우리의 헌신의 표징, 이라고 똑똑히 기도합니다. 명분으로서는 헌신이지만, 본심으로서는 약소한 것밖에 바치지 못하고, 그걸로 얼버무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떠한 것인가고 하면, 우리도 마리아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어서 신앙을 표현해서, 주여, 당신이야 말로 우리의 그리스도, 우리의 구주, 우리는 어떠한 여자 역자의 말에도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뚜렷히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주여, 오직 당싱의 은혜만, 죽음에 이기는 생명만,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우리는 현혹되는 일은 없다.

가룟 유다, 한 제자가 거기에 있었다. 이 유다는 마리아 보다도 본래 주 예수께 가까운 자였다. 주 예수는 유다를 대단히 신뢰하고 있으셨다. 13장의 배반의 기사에 들어 갈 때, 13장29절에는,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라고 쓰고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주 예수께 아마 가장 신뢰받고서, 네게 지갑을 맡겨 두면 걱정없다고 말하시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이 유다는 아마 정의감에 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안의 불공평에 견딜 수 없어하는남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지못한 사람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 맡아 가진 지갑의 내용물은 자기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명절을 위해선가지 가난한 사람을 위해선지, 하나님에의 헌물을 위함인지, 사람들에게 사랑의 일을 하기 위해선지, 그때문의 돈을 주 예수께 맡아 가지고 있었다. 그 출납을 관리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유다로서는 당연하겠지요. 눈 앞에서 향유가 낭비된다고 생각했을 때에, 이것을 팔면 300데나리온이나 된다. 대체 몇 사람의 식료품을 살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으메 틀림없다. 언제나 자기들의 지갑의 가난함, 사랑의 가난함을 탄식하고 있을 때에 분연했던 것은 당연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6절은 다른 복음서가 쓰고 있지 않은 것을 멋대로 부가한 해석이다 라고 생각해서, 이것은 그다지 대단한 의미를 갖지 않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다. 특히 “그는 도둑이라“라는 말을 남의 일로서 지나쳐 읽을 수는 없다. 예수의 제자였던 남자가 도둑질을 하고 있다. 내용물을 빼내서 유흥에 돈을 낭비했던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틈은 없는 듯하다. 주가 맡겨 주셨던 돈을 슬쩍한다란 어떠한 것인 것일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다“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언제나 가난한 사람의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언제나 지갑을 맡겨져 있으면서, 유다는 정말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그와 같이 마음에 두고 있던 셈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 아래서 주의 은혜를 슬쩍한다. 자신의 스승이고 주인 예수의 사랑의 일에 자신이 가장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같으면서, 결국은 자신의 이익을 탐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기서 더욱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율에 따라서 남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사랑도 또한 유다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성과를 예측하는 사랑이 아닌가. 자신의 이익을 가져오기 위한 사랑이었던 것이 아닌가. 이만큼 돈이 있으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데도, 라고 말하거나 한다. 그렇게 말해서 타인의 비평까지 한다. 유다는 단지 비평만이 아니라 실제로 베품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주 예수는 베품을 할 때, 자신의 한 쪽 손으로 한 것을 다른 한 쪽의 손이 모르게 하라고 산상설교에서 말하셨지 않은가. 그런데도 유다는, 언제나 한 쪽 손으로 한 것을 다른 한 쪽 손에 알게해서, 우리는 이만큼의 일을 할 수 있었다 라고 손가락을 접어 세서, 주 예수의 마음으로부터 먼 곳에서 사랑의 일에 자랑을 품는다. 그리고 손해보는 일은 싫어져 간다. “우리는 주의 은혜를 훔치고 있을뿐이 아닌가“. 이 말은 소중하다고 이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는 도둑이라“고 하는 말에 포개서, 나도 도둑이었으므로, 하고 생각나게해 주시기 위해서, 주 예수는 8절에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셨습니다. 여기는, 유다여, 너야말로 정말로 가난한 자들의 것을 언제나 마음에 두어 주었으면 싶다. 너는 가난한 사람들과 언제나 같이 있으니까, 뒤를 부탁한다, 라고 말하고 있으시다고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실한 의미에서 언제나 마음에 담았으면 싶다. 그러나 나는 같이는 없다. 나는 단 한번 여기 온 자이고, 단 한번 죽는 자이다. 진정한 하나님인 내가 진정한 사람으로서 온 것은 여기에서의 단 한번에 한하는 것, 그리고 단 한번에 한하여 너희를 위한 구원을 완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명하신 사랑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지금 죽음 가운데로 향하여 간다.

죽음이 주 예수께 있어서 가벼운 것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찌피 주 예수는 다시살아나는 것이니까 라고 해서 죽으셨던 것이 아니다. 정말로 인간이 하나님께 떼밀어져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다른 어떠한 인간보다도 진짜로 받아내고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 정말 죽음에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싸움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때문의 기름부음을 마리아에게서 받고 있으시다. 마리아도 또한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행위가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또한 마리아가 어딘가에서 감지하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이 마리아에게 응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주 예수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의 것을 언제나 마음에 담으면서 사는 걸음도, 여기서야 말로, 너희의 진실한 걸음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닐까 하고 우리는 생각한다.

지금부터 주의 성찬에 참여합니다. 물어지는 것은, 우리의 주 예수를 어떠한 분이라고 부르냐고 하는 신앙이고, 또한 그 신앙을 어떠한 헌물을 가지고 표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는 아무 것도 구하고는 있으시지 않다. 단 하나 구하고 있으시는 것은 우리의 주께 대한 사랑입니다. 주를 섬기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