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8 믿음이 오다

갈라디아3장23-29절, 이사야56장1-8절

2018년을 맞아 벌써 1월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자, 대체로 경망스러운 져널리즘이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며, 또 그러한 텔레비젼이나 인테넷 등에 금방 좌우되는 우리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 새로운 해를 맞이한 우리 마음에는, 어딘가 그다지 안정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이, 너무나도 많이 화자되고, 우리 마음에 소근대어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여기 잠시동안의 갖가지 생활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자기 손으로 자기생활을 확실한 것으로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물리도록 맛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과 어디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일까. 우리들 그리스도인은,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훨씬 이 세상 것에 관하여 앞일을 내다 볼 수 있는 인간인 것일까. 지금 위기다, 위기다 하고 말하고 있지만, 과장하여 떠벌리고 있을 뿐의 것으로, 정말은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이다고 하는 것을, 정치가보다도 더 앞일을 내다 볼 수 있는 눈으로 앞일을 내다볼 수 있으므로 침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은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리에게도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어떻게 뒤짚혀질지 모르지만, 믿음조차 있으면 어떤 말썽이 일어나도 자신의 마음은 흔들림은 면하는 것이다 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곤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믿음이란, 그러한 것인 것일일까.

우리도 또, 사람들이 오른 쪽으로 달리면 자신도 오른쪽으로 달리고 싶어지고, 왼쪽에 사람들이 모이면 왼쪽으로 모이지 않으면 불안에 사로 잡히는 인간인 것이 아닐까. 무릇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신념을 갖고 있는 인간은 강하다고 하는 것으로 요약되는 것일까. 우리가 단지 그와 같이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자기들의 신앙에 관하여 얼마나 신념이 없는 자신들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종종인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의 체험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체, 그렇다고 하면, 우리의 신앙이란 무엇인 것인가.

이점을 새삼 주의 깊고 신중히 생각하려고 할 때에, 우리가 자기 신앙을 어떻게 말로 나타내고 있는지, 자신의 신앙을 말로 나타낼 때, 어떠한 말, 어떠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냐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말/언어는, 그것을 말로 나타내는 사항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대단히 정직하게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우리가 신앙을 말할 때에, 곧잘 하는 말씨는, 나는 신앙을 갖고 있다. 저 사람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한 말투입니다. 혹은 나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 나는 믿을 수가 있다, 라고 말한다. 따라서 믿을 수가 없다, 믿음을 처분했다, 버렸다, 그러한 표현이 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다, 믿을 수가 있는 동안은 교회에 오고 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게 되면 교회에 올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로 오지 않아도 된다. 자신은 지금은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자신이 교회로 와도 되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자신의 신앙의 유무로 인해서 동요한다. 신앙을 소유하고 있냐 아니냐 어떠냐로 동요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고조차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신들의 믿음에 관한 우리자신의 말씨를 생각하면서, 오늘 주어진 성경의 말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는 의표를 찔리는 생각이 든다. 좀전에 같이 읽었을 때에, 그러한 생각으로 읽으신 분도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좀 민감한 생각으로 읽으면, 자신은 신앙에 관하여 이와 같은 쓰기를 할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표현을, 바울은 들어쓰는 것입니다.

처음에 “믿음이 오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대체 자신의 신앙에 관하여, “믿음이 오다”고 하는 표현을 한 적이 있을까. 게다가 실은, 여기 사용되고 있는 그리이스어는, 더 단순하게, “왔다”고 번역해도 좋은 말입니다. “믿음이 왔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찾아 왔다”, 그러한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찾아 오는 법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믿음을 갖게 되고 나서”라는 표현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이겠지만, 바울은 그와 같이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믿음이 찾아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온 곳에서 그리스도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믿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여기 나타나는 다름은 분명합니다. 찾아 온다, 고 하는 것은 자신의 안에서가 아닌 것입니다. 신앙이 밖에서 찾아 온다. 신앙이 자신 안에 생겨났던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의 신앙 이해의 근본에 관계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점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할 때, 배워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26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리이스어 원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하여”라고 읽을 수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밖이 아니라, 바로 <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혹은 믿음이 찾아 왔다고 말하는, 이와 같은 표현은, 우리에게 있어서 익숙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임장에서 본다면, 내가 믿음을 가졌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고 하는 듯한 말투는 바울에게는 이제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혹은,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지면, 내 안에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러한 식으로 밖에 말할 수 없다. 내가 믿음을 갖도록 되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믿음이 나에게로 찾아 왔다, 밖에서 찾아 왔다. 믿음이 자신을 사로잡아, 침입해 와 버렸다. 그것이 바울이 알고 있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믿음에 관하여 말할 터인 표현과, 바울이 여기서 당연한 것처럼 쓰고 있는 믿음에 관한 표현의 차이는, 믿음이 자신 안에 있냐, 밖에 있냐고 하는 이해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란 그 믿음이 밖에 있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다. 안에 있는것에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은 밖에 있다. 만일 자신 안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이 우리 안에 들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 우리를 제것으로 해 버렸다고 하는 것에서 있어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구나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그렇다, 그러한 믿음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생각을 품는 사람도 많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금방 맛보는 것은, 당신은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고 말들고서, 곧장, “나는 믿습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의 자신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한 것입니다.

믿으라고 권하고,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고 촉구하면서, 믿을 수가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가능하면, 전도는, 훨씬 간단한 것이 되어 버린다. 금세 그리스도인의 수도 늘어 버리겠지요.

츠쿠바동경교회 당회장으로서 세번째 공동의회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대체 여러분은 무얼하러 오는 것일까? 저의 전하는 말을 들으러 온다. 저의 말을 듣고, 그것을 계속해서 들으며 사는 것입니다. 달리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진리의 말, 생명의 말을 들으려고 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저 자신이 그 임무任에 견딜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 서는 것인가? 저도 믿음이 밖에서 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이, 여러분에게 믿음을 제공하고, 지탱시켜 드릴 능력이 제 안에 있다고 생각해서 강단에 서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세례입회식 때에도, 제가 읽는 성경의 말은, 제 이름에 의해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되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어서 세례를 베푸는 것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어서입니다. 세례의 물을 붓는 전도자의 복은, 바로, 믿음이 우리 밖에서 와서 새례받는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서 일하고 있으시는 것을 가장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한그루의 식물이 자력으로 성장할 수가 없듯이, 언제든지 대지에 지탱되고, 대지 안에 뿌리 박아서, 자양분을 섭취해서, 그것으로 인해서만 살도록,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지, 한 사람의 목사의 말이나 그 지도력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 안에서는 믿음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듣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종교와를 명료하게 가르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안에서 생겨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믿음이라는 것은 밖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심, 이는 바울의 여기서의 말로 하면, 율법을 만들고, 율법의 포로가 되어 버리는, 죄의 원흉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그와같은 종교심도 깨 부수기 위해서, 믿음은 밖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것은, 우리의 훌륭한 깊은 신앙심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시작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우리는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하나, 어쩌면, 우리가 입에 담는 것을 주저할지도 모를, 신앙표현을 합니다. 그것은, 26절의,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떠한 의미인 것일까.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아들“과 똑같은 의미의 것을, 우리가 그다지 보통으로는 사용하는 말이 아니지만, 딴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29절 끝에 나오는 “유업을 이을 자”라는 말입니다. 29절 마지막의, “약속에 의한 유업을 이를 자“, 그리고 여기 계속되는 4장에서 말하면, 7절의 마지막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입니다. 상속을 한다. 하나님의 재산을 이어 받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자녀)인 것의 하나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페르샤(바사)에는 이러한 속담이 있답니다. “죽음, 이것만은 모든 이가 이어받는 재산이다“. 페르샤라는 나라에서도 빈부의 차가 대단히 컸다. 풍요로운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실로 가난한 사람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풍요로운 것이어도, 아무리 가난해서 부모로부터 아무런 유산도 이어받지 못하는 듯한 자여도, 인간평등하게 이어받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죽는 것이다 라는, 그러한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상속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과 거꾸로입니다.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자녀)이다 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상속인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열심히 수고해서 희생적인 일을 해서, 자식에게 재산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고생한 부모라면 부모일수록, 자기 아이가 자신이 한 고생을 겪지 않아도 되도록,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다고 원하는 법이다. 게다가, 이 아이의 생명을 할 수 있는 한 풍요롭게 지키게 해 주고 싶다. 바로 그와 같이,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괴로운 고생을 거듭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남기려고 해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완전히 부모에게 의탁하여 생명을 주어지고, 지탱된다. 이점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생해서 무엇을 남겨 주시고 있는가. 그것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최후의 말이 아니라고, 그러한 것이 말할 수 있게 되는 확신입니다. 그러한 학신에 뿌리두는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자신의 재산을 인간에게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제발 그 재산을 받아 주십시오 라고, 인간에게 언제든지 부탁하고 있으시다. 청하고 있으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탁한다, 청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릎꿇는다고 하는 일이 있을까. 요한복음 13장은,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노예의 모습을 취하여, 유대인 노예라면 유대인이라는 긍지에서 그건 것을 하지도 않았던, 유대인 이외의 이방인 노예가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남의 발을 닦는다고 하는 것을 하셨다. 예수는 제자들의 노예로서 발밑에 무릎 꿇고서, 먼지투성이의 발을 씼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다른 복음서는 반복해서, 주 예수가, 인자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온 것이다 라고 가르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종으로서 섬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재산을 건네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건네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고생은 그와 같이 해서 나타나고, 그 아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고 하는 곳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해서까지, 하나님은 자신의 재산인 하나님의 생명을 제공해서, 이것을 받으라고 말하신다. 주의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는, 그때마다 이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향응에 참여한다고 해도 좋은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믿음이 왔다, 그 믿음이 우리의 마음의 사실로 되고, 존재를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도, 세례를 받는 것에 있어서 였던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주 그리스도 그 자체가,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덮는 존재로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해 주셨던 것입니다. 너희 인간의 역사속에서 나와 함께 살 수 있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표징으로서 세례와 성찬을 주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표시로 세례와 성찬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입고 돌아간다. 매 일요일 그리스도를 새로 입고서, 그것이 매일의 생활의 우리의 옷차림으로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 교회로 사는 자는 모두 하나가 된다. 유대인과 그리이스인의 구별도, 노예와 자유인의 차별도,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별도, 모든 차별은 없어 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우리는 제각각의 은사, 제각각의 개성을 살려서, 하나님의 자녀들, 주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큰 은혜를 마음으로 부터 감사하고 싶습니다.